SK하이닉스가 글로벌 반도체 수요 흐름을 반영해 실적과 업황에 대한 전망을 보다 보수적으로 조정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AI 인프라 확산이 메모리 중심의 가치사슬을 재편하면서도, 가격과 공급의 미세한 균형 변화가 기업들의 판단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어서다. 업계에서는 2024년 이후 이어진 메모리 강세를 ‘슈퍼사이클’로 부르지만, 2026년을 앞두고는 HBM 중심의 고성장과 범용 D램·낸드의 변동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서버와 데이터센터 투자가 커질수록 서버 한 대당 D램과 HBM 탑재량이 늘고, 기업용 스토리지인 eSSD 수요까지 동반 확대되면서 메모리·스토리지 비중이 구조적으로 커지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이런 변화는 시장이 ‘AI 메모리’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HBM 가격이 향후 경쟁 심화와 생산능력 확대에 따라 조정 국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나온다. 업황의 큰 방향은 성장으로 기울어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어느 구간에서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WSTS가 본 2026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전망과 메모리의 무게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는 2026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전년 대비 25% 이상 성장해 약 9,750억 달러 규모에 이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1조 달러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AI 인프라가 시장 구조 자체를 바꾸는 ‘과도기’라는 진단과 맞물린다. 이 가운데 메모리 부문은 전체 성장률을 웃도는 30%대 증가세가 예상되며, 서버·데이터센터용 메모리가 특히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는 관측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분석에서는 2026년 메모리 시장 규모가 4,400억 달러를 넘길 수 있다는 추정도 제기된다. 현장에서는 AI 학습과 추론이 동시에 커지면서, 같은 랙 공간에 더 많은 연산과 메모리 대역폭을 집어넣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흐름이 이어질수록 ‘연산 칩의 세대교체’보다 ‘메모리의 병목 해소’가 투자 판단의 핵심이 되는 순간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AI 인프라가 만든 수요 구조 변화와 ‘전망 조정’의 배경
AI 서버가 늘어날수록 D램과 HBM의 탑재 용량이 커지고, eSSD 같은 스토리지까지 수요가 확장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메모리 업체들에게는 호재지만, 제품 믹스 변화가 빠른 만큼 공급 계획이 조금만 흔들려도 가격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한다. 업계가 말하는 전망의 조정은 성장 기대를 접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HBM 중심의 고성장’과 ‘일부 제품의 가격 조정 가능성’을 동시에 감안해 리스크를 줄이려는 계산에 가깝다.
이제 관전 포인트는 단순한 출하 증가가 아니라, 어떤 메모리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다. 결국 다음 장에서는 HBM이 왜 시장의 중심으로 떠올랐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SK하이닉스의 기술 경쟁력이 어떻게 평가받는지가 핵심이 된다.
HBM3E가 주력으로 굳어지는 시장에서 SK하이닉스의 기술 경쟁력
업계에서는 2026년 HBM 시장의 주력 제품이 HBM3E가 될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엔비디아의 신형 AI 가속기 Blackwell Ultra 라인업을 비롯해, 구글과 AWS 등 빅테크가 자체 ASIC 기반 AI 칩 개발을 확대하면서 HBM3E가 최적의 선택지로 거론되고 있다. 주요 리서치와 증권가 분석에서는 2026년 HBM 출하에서 HBM3E 비중이 약 3분의 2 수준에 이를 수 있고, HBM4는 점진적으로 비중을 키울 것으로 본다.
이 구도에서 SK하이닉스는 ‘공급 안정성’과 ‘패키징 생태계’에서 강점을 인정받고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2025년 2분기 기준 HBM 출하량 점유율 62%로 1위를 기록했고, 3분기에는 매출 기준 57%로 과점적 지위를 유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골드만삭스는 최소 2026년까지 SK하이닉스가 HBM3·HBM3E에서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며 HBM 점유율 50% 이상을 이어갈 수 있다고 분석했다.
HBM4 전환기, 고객 다변화와 패키징 협업의 의미
HBM3E에서 쌓은 양산 경험이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느냐가 전환기의 관건이다.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HBM4 양산 체제를 확보했다고 알리며 시장 개화에 대비해 왔다. 또한 TSMC와의 패키징 기술 협업을 강화하고, 청주 M15X 팹 구축 등 생산 기반을 확장하는 동시에 HBM 전담 조직과 글로벌 AI 리서치 센터, 글로벌 생산 인프라를 신설해 대응 체계를 넓혔다.
UBS는 구글의 최신 TPU(v7p·v7e)와 관련해 SK하이닉스의 초기 공급사 가능성을 언급하며 빅테크 고객사 내 입지를 강조한 바 있다. 또 UBS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Rubin 플랫폼에 탑재될 HBM4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약 70% 점유율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했다. 결국 ‘HBM3E의 주도권’이 ‘HBM4의 선점’으로 이어지는지 여부가, 조정 국면에서도 방어력을 결정할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슈퍼사이클 기대와 가격 조정 리스크, 투자 전략이 갈리는 지점
메모리 강세를 두고 ‘슈퍼사이클’이라는 표현이 확산된 배경에는 가파른 수요 증가뿐 아니라 가격 전망이 자리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2026년을 1990년대 호황기에 비견되는 국면으로 정의하며, 글로벌 D램 매출이 전년 대비 51%, 낸드 매출은 45% 증가하고, 평균판매단가(ASP)는 D램 33%, 낸드 26%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BofA는 SK하이닉스를 메모리 업계 ‘톱픽’으로 꼽으며 슈퍼사이클의 수혜가 집중될 가능성을 거론했다.
HBM만 따로 보면 성장 전망은 더 가파르다. BofA는 2026년 HBM 시장 규모를 전년 대비 58% 늘어난 546억 달러로 추산했다. 골드만삭스는 특히 ASIC 기반 AI 칩향 HBM 수요가 82% 급증해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할 수 있다고 봤는데, 이는 AI 인프라 투자가 범용 GPU 중심에서 용도별로 세분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조사기관과 외신에서는 2026년 이후 HBM 가격이 경쟁 심화와 증설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고 본다. 후발 업체들의 D램 생산 확대, 글로벌 규제 이슈 같은 지정학적 변수도 중장기 리스크로 지목된다.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는 고성능 HBM에서의 기술 격차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평가가 우세하며, 결국 투자의 초점은 ‘증설’ 자체보다 ‘수율과 패키징, 고객 인증을 포함한 공급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 업계의 공통된 메시지로 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