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산업의 무게중심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규제가 혁신을 막는다”는 오래된 프레임은 힘을 잃고, 이제는 규제를 얼마나 정교하게 받아들이고 준수 역량을 얼마나 체계화했는지가 기업의 생존을 가르는 잣대가 되고 있다. 특히 글로벌 관할권들이 법과 감독 체계를 현실화하면서, 시장은 기술만으로 승부하던 초기 국면에서 벗어나 수준 높은 컴플라이언스를 갖춘 주요 플레이어 중심으로 재편되는 모습이다.
이 변화는 투자자 보호와 금융범죄 방지라는 정책 목표와 맞물려 있다. 유럽연합(EU)에서는 MiCA(암호자산시장규제)가 요구하는 인가, 준비금, 거버넌스 기준에 맞추는 작업이 진행 중이고,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제도 설계와 감독기관 간 역할 조정을 놓고 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중국은 거래와 채굴에 대한 금지 기조를 유지하며 중앙화된 디지털 화폐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국가별 온도차가 커졌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규칙이 명확한 곳으로 자본과 인력이 이동한다는 점이다.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자산 사업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PwC “규제는 제약이 아니라 시장을 재편하는 힘” 보고서가 짚은 변화
글로벌 회계법인 PwC는 1월 22일 업데이트된 글로벌 암호화폐 규제 보고서에서, 규제 환경이 ‘초안’ 단계에서 ‘집행 가능한 규칙’으로 넘어가며 산업 지형을 바꿀 것이라고 진단했다. PwC는 특히 스테이블코인, 규정 준수, 그리고 신뢰받는 허브가 되기 위한 관할권 간 경쟁이 산업의 다음 국면을 정의할 수 있다고 봤다.
보고서가 강조한 축은 두 가지다. 첫째, 규제 논쟁 자체보다 시장의 정당성과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국가 간 경쟁이 전면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둘째, 투자자 보호와 금융범죄 예방을 위해 국경 간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는 흐름이다. PwC의 글로벌 및 미국 디지털 자산 책임자인 매트 블루멘펠드는 규제 협력의 모멘텀이 기관 채택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언급하며, 규칙이 산업을 “책임 있게 확장 가능한 구조”로 만든다는 취지를 밝혔다.
규정 준수의 비용은 분명 커진다. 다만 규칙이 명확해질수록 은행 서비스 접근성, 신규 상품 설계, 기관 자금의 참여가 촉진될 여지가 커진다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거래 인프라와 보안 체계 고도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해킹과 같은 위험 요인이 시장 신뢰를 좌우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됐다. 관련 쟁점은 암호화폐 보안 위협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주제다.

EU MiCA와 미국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만든 규칙의 경쟁
유럽에서는 MiCA 시행에 따라 사업자들이 인가 요건, 준비금 및 거버넌스 요구사항에 맞춰 운영 체계를 조정하고 있다. 규제의 핵심은 ‘누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지’를 명확히 하고, 이용자 자산 보호와 발행 주체의 책임을 강화하는 데 있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규정이 촘촘해질수록 유럽 내 사업자 간 합종연횡이 늘고,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은 방향성이 한 가지로 수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PwC 보고서는 CLARITY 법안이 은행권의 스테이블코인 수익률 우려 등으로 지연되는 흐름을 언급하는 한편,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결제에 대한 관심과 달러 영향력 강화라는 정책적 동기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CBDC에 반대한다는 점도 국제 흐름과의 대비로 거론됐다.
이 같은 환경에서는 준수 체계를 갖춘 대형 플랫폼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진다. 주(州) 단위 인허가 체계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연방 차원의 정합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거래 인프라의 안정성과 감시 역량이 기업 가치의 핵심 지표로 올라섰다. 미국 내 거래소 경쟁과 영향력은 코인베이스의 미국 시장 우위 같은 이슈로도 꾸준히 조명된다.
한국의 단계적 규제 강화와 중국의 금지 기조가 만든 아시아의 양극화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대비되는 경로를 걷고 있다. 한국은 2024년 7월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시행으로 이용자 보호와 불공정거래 규제에 초점을 맞췄고, 거래소 등 VASP에 예치금 관리와 이상거래 감시, 신고 의무를 강화했다. 이어 2025년 하반기에는 상장 투명성, 정보공개 의무, 스테이블코인 발행 및 준비자산 관리, 상환권 보호 등 2단계 규제가 예고되며 규율 범위가 넓어졌다.
시장 반응도 규제의 설계 방향을 보여준다. 상장 기준과 모니터링이 강화되면서 사기성 프로젝트나 ‘먹튀’ 리스크가 줄었다는 평가가 뒤따랐고, 기관과 법인의 참여 문턱도 단계적으로 완화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적격 기업 3,500곳 이상이 디지털 자산 거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한 완화를 추진하는 정책 논의 역시, ‘관리 가능한 범위에서의 개방’이라는 기조를 드러낸다.
반대로 중국은 2019년 이후 거래와 채굴 금지 기조를 유지했고, 2025년 1월에는 외환 규제 당국이 은행에 암호화폐 관련 위험 거래를 모니터링·보고하도록 지시하는 등 자금 추적을 강화했다. 그 결과 채굴자와 일부 사업자는 미국, 카자흐스탄 등으로 이전하며 글로벌 생산·거래 구조에 영향을 줬다. 공식 시장은 위축됐지만, 우회 거래가 남는 현상도 함께 관측된다.
결국 아시아에서도 ‘규칙을 갖춘 개방’과 ‘강력한 통제’의 갈림길이 선명해졌다. 업계는 이제 기술 서사만으로 확장하기보다, 각국의 규제 체계 속에서 수준 높은 내부통제와 투명성을 갖춘 주요 플레이어로 살아남을 전략을 요구받고 있다. 다음 국면의 승부처는 규제의 강도가 아니라, 규칙을 실행 가능한 운영모델로 전환하는 속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