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케일이 양자컴퓨팅 발전이 장기적으로 블록체인의 보안을 뒤흔들 수 있다며, 업계가 지금부터 전환 준비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공식화했다. 핵심은 “언젠가”가 아니라 “얼마나 갑자기”다. 구글 퀀텀 AI 연구를 계기로, 기존 추정치보다 훨씬 적은 자원으로 공개키 암호를 흔들 수 있다는 분석이 확산되면서 시장의 시선도 달라졌다. 아직 현실의 공격이 당장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암호화 체계가 무력화되는 순간 디지털 자산 네트워크는 신뢰의 기반부터 흔들린다.
이 논의는 기술 논쟁을 넘어 정보보호와 거버넌스의 시험대로 번지고 있다. 예컨대 결제 효율성과 처리량을 강점으로 내세운 체인들은 ‘속도’와 ‘안전’ 사이에서 고비용 선택을 해야 하고, 가장 보수적인 업그레이드 문화를 가진 비트코인은 기술보다 합의가 더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레이스케일이 던진 질문은 단순하다. 양자위협이 현실이 되기 전에, 각 네트워크는 어떤 방식으로 대비할 것인가.
그레이스케일 보고서가 강조한 양자 컴퓨팅 위험과 암호화 전환 필요성
그레이스케일은 최근 리서치 보고서 ‘더 스택(The Stack)’을 통해, 퍼블릭 체인이 양자컴퓨팅에 대응하는 암호화 체계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리서치를 총괄하는 잭 팬들(Zach Pandl)은 양자 기술의 발전이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위협이 눈에 보이는 시점에 움직이면 대응 시간이 부족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가 짚은 토대는 오래된 이론에서 출발한다. MIT 수학자 피터 쇼어가 제시한 쇼어 알고리즘은 공개키 기반 암호를 무력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최근 구글 퀀텀 AI 연구가 업계의 경각심을 키웠다. 그레이스케일은 “암호학적으로 의미 있는 양자 컴퓨터”로 가는 진전이 ‘불연속적 도약’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핵심 시사점으로 정리했다.
이 흐름은 블록체인 네트워크마다 체감 강도가 다르다. 거래 모델과 합의 메커니즘, 블록 시간 등에 따라 공격 난이도와 노출 면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케일이 강조한 결론은 명확하다. 기술적 해법(포스트 양자 암호 등)은 성숙 단계에 진입했지만, 산업이 이를 운영 환경에 얼마나 빠르게 이식하느냐가 새로운 위험 관리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솔라나와 XRP가 시험하는 양자 내성 보안과 성능 저하 논쟁
그레이스케일은 솔라나(Solana)와 XRP 레저(XRPL)를 양자 내성 접근을 시험하는 대표 사례로 언급했다. 두 네트워크는 실제 블록체인 환경에서 미래 공격을 견딜 수 있는 암호 기술을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용 가능성’을 논문이 아니라 운영 관점에서 검증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전환 비용은 만만치 않다. 외신 보도에서는 양자 내성 기법을 얹을 경우 연산 부담이 커져 처리 속도가 크게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고, 최대 90% 수준의 성능 저하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초당 처리량과 사용자 체감을 경쟁력으로 삼아온 체인들에게는, 보안 강화가 곧바로 서비스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딜레마는 실무 현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가령 글로벌 결제 흐름을 염두에 둔 서비스 운영자는 지갑 서명 체계가 바뀌는 순간 고객 지원, 거래소 입출금 프로세스, 커스터디 시스템까지 전면 재검증이 필요하다. 결국 ‘얼마나 튼튼한가’만큼이나 ‘얼마나 무리 없이 바꿀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양자 내성 전환은 기술혁신이면서 동시에 운영 리스크 관리의 문제라는 점이 여기서 선명해진다.
이런 맥락을 더 넓게 보여주는 사례로, 관련 논의는 이더리움에도 번졌다. 코인데스크는 구글 연구를 계기로 이더리움이 계정 키, 스테이블코인 관리자 키, 스마트 계약 코드, 합의 메커니즘, 데이터 가용성 등 여러 층위에서 공격 벡터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더리움 재단 연구원 저스틴 드레이크는 양자 키 복구 가능성에 대한 확률 추정을 언급한 바 있지만, 재단이 ‘양자 이주’ 일정 자체를 공식화해 공개한 것은 아니다.
비트코인 양자 위협은 기술보다 거버넌스 문제라는 경고
그레이스케일이 특히 강조한 대목은 비트코인(BTC)의 리스크가 ‘순수 기술’보다 ‘사회적 합의’에 가깝다는 점이다. 잭 팬들은 비트코인이 UTXO 모델과 작업증명(PoW) 합의, 네이티브 스마트 계약 부재, 그리고 조건에 따라 양자 취약성이 낮은 주소 유형을 활용한다는 이유로 다른 체인보다 엔지니어링 관점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이미 온체인에 공개키가 영구적으로 노출된 지갑에 상당한 물량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레이스케일은 약 690만 개의 비트코인이 이런 형태로 보관돼 있다고 지적했고, 이 중 약 100만 개는 사토시 나카모토 소유로 추정된다고 언급했다. 만약 양자 공격이 가능한 시대가 오면, ‘움직이지 않는 코인’을 어떻게 다룰지부터가 논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바이낸스 공동창업자 창펑 자오(Changpeng Zhao)는 사토시의 코인이 이동하면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신호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해당 주소를 잠그거나 사실상 소각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레이스케일 역시 선택지를 비슷하게 제시했다. 소각, 현상 유지, 혹은 취약 주소의 지출 속도를 제한해 단계적으로 위험을 낮추는 방식이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CTO가 결정을 내리는 조직이 아니다. 글로벌 커뮤니티 합의로 움직이는 네트워크에서, 프로토콜 변경은 늘 정치적 비용을 동반해 왔다. 그레이스케일은 과거에도 프로토콜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돼 왔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양자위협 대비의 진짜 장애물이 ‘기술의 부재’가 아니라 ‘합의의 속도’가 될 수 있다고 봤다. 결국 정보보호의 미래는 코딩만큼이나 거버넌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이 이슈는 당장 가격 변동보다 네트워크 신뢰를 지탱하는 규칙과 업그레이드 역량을 시험한다. 양자 시대가 언제 열리든, 그 전환의 무게는 이미 퍼블릭 체인들의 의사결정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


